하얼빈 스틸 컷 / 사진=CJ ENM, 하이브미디어코프설득의 가장 기본적인 기술은 차분함이다.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가치 있고 존엄한 것들을 말할 때, 그것의 진리에 다가서는 건 바로 차분함에 배인 엄숙함이다. 영화 '하얼빈'(감독 우민호)은 바로 이러한 미덕이 있는 영화다. 고요하고 침착하지만 기저의 감정들은 치열하고 뜨겁다. 곱씹을수록 뜨거운 감정이 솟구친다. 극적인 재미를 기대했다면 실망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닌 영화다. 이 영화를 사유하는 순간, 가슴 깊숙한 곳에서 감개가 찾아온다.
'하얼빈'의 시대 배경은 일제강점기다. 여럿 되는 주인공들은 독립군이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필수적으로 알고 있는 안중근(현빈) 의사도 나온다. 대개가 안중근이라는 이름을 아는 까닭은 1909년 10월 26일에 있었던 일 때문이다. 그리고 이 영화의 제목이 '하얼빈'인 이유도 이날에서 비롯됐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일본 정치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그가 겨눈 총구에 의해 이토 히로부미는 사망했고, 안중근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하얼빈'의 이야기는 이렇듯 가치 있고 숭고한 것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이 숭고함에 진실되게 다가서기 위해, 요란은 최대한으로 밀어두었다. 담백하고 정적이다.
영화는 거사 당일과 전후의 이야기를 그린다. 그리고 이것을 안중근이라는 한 인물에만 초점을 두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이토 히로부미(릴리 프랭키)의 암살을 직접 실행한 건 안중근이 맞다. 하지만 안중근은 그곳에 혼자 있지 않았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의 초대 총리를 지냈던 인물이었고, 그를 암살한다는 계획은 거사(擧事, 巨事)였다. 엄청난 일이었고, 혼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안중근 옆에는 동지들이 함께했고, 영화는 그들에게도 시선을 골고루 분산한다.
"이분들의 고난의 길에 대한 표현을 절대 쉽게 찍을 수 없다. 하여 블루 스크린 앞에 설 수 없다. 그러니 각오하고 촬영장에 오라."
우민호 감독은 현빈을 비롯한 '하얼빈' 출연진에게 촬영을 시작하기에 앞서 이 같은 말을 했다. 영화는 담담하게 흘러가지만, 찍는 과정은 담담함과 거리가 멀었다. 몽골, 라트리아, 한국을 오가며 찍은 영화는 촬영장에 당도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다. 또 촬영장의 공기는 차갑고 뜨거움의 중간이 없었다. 마치 CG처럼도 보이는 압도적인 배경들은 가짜가 없다. 실제만이 가질 수 있는 자연 경관의 경이로운 미장센은 '하얼빈'의 또 다른 미덕이다.
"싸움은 쪽수보다 기세", "끝까지 싸우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등 문득문득 치고 들어오는 묵직한 대사에도 울컥해진다. 공감을 호소하지 않고, 공감을 사유한다.
"조선이란 나라는 수백 년간 어리석은 왕과 부패한 유생들이 지배해온 나라지만 저 나라 백성들이 제일 골칫거리야. 받은 것도 없으면서 국난이 있을 때마다 이상한 힘을 발휘한단 말이지. 300년 전에 도요토미가 조선을 침공할 때도 의병들이 나왔고 지금 이곳 만주에도 의병들이 골칫거리야."(-이토 히로부미 대사 中)
식민지의 아픈 역사를 바탕으로 안중근과 독립군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펼치는 여정은 그 상황 자체로 울림이 있다. '하얼빈'은 115년 전 독립군들이 실제 느낀 감정에 다가서고, 그것의 담백한 화법이 1909년부터 오늘날을 차갑고 뜨겁게 관통하며 감동을 이끈다.
'하얼빈'은 오는 24일 개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