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의 씨네만세 905] 서울독립영화제 <급한음끄기>올해로 50회째를 맞은 서울독립영화제엔 '새로운선택'이란 섹션이 있다. 서울독립영화제에 대해 떠올릴 때면 자주 떠오르는 이 섹션이 나는 이 영화제의 정체성과 꼭 어우러지는 것만 같다.
그렇다면 이 섹션은 대체 무엇인가. 무엇이 새로운선택이란 이름 아래 작품들을 모아두도록 하는가. 영화제 측은 이 섹션 단편 초청작을 결정한 사유를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적어두었다.
새로운선택 부문의 단편을 선정할 때면 심사위원들은 '새로운'의 기준에 대해 먼저 생각합니다. 이전에 존재한 적 없는 영화가 가장 부합하겠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작품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신 익숙한 소재, 눈에 익은 장르, 보편의 메시지라고 할지라도 이에 접근하는 감독의 시선과 태도와 이미지를 다루는 솜씨와 독특한 연기 스타일을 가진 배우의 출현과 스태프들의 탁월한 재능 등이 다른 방식으로 발휘될 때 작품에 새로운 공기를 주입해 신선한 충격을 주고는 합니다. -새로운선택 단편 선정의 변 중에서
올해 영화제에서 새로운선택 단편으로 선정돼 상영된 작품은 모두 18편이다. 무엇 하나라도 달라야 한다는 이 섹션에 진입하기 위해선 보통의 마음가짐으론 쉽지 않을 터, 이 섹션에 속한 작품을 기꺼이 선택하는 이유는 바로 영화제의 안목과 기준을 믿기 때문이다.
▲ 급한음끄기 스틸컷ⓒ 서울독립영화제
흔히 마주할 수 없는 새로움김명선의 20분짜리 단편 <급한음끄기>는 과연 새로운 선택과 맞아떨어지는 영화다. 말인즉슨 이 영화가 아니고서야 어디서도 보지 못할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소재, 또 그를 풀어가는 과정에서의 선택, 그를 가능케 한 연출이 모두 그러하다.
영화는 층간소음을 주요한 소재로 활용한다. 아파트며 빌라, 층층이 쌓인 공동주거지가 주거의 일반적 형태가 된 건 벌써 반세기를 훌쩍 넘은 이야기다. 그럼에 층간소음 또한 문학과 영화, 예술의 흔한 소재가 되어왔는데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기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급한음끄기>는 그에 대한 도전적 응답과도 같다. 소음 때문에 층을 건너 이웃을 찾아간 이들과 그로 인해 벌어지는 한 편의 소동이 미처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 미스터리적 설정과 어우러지며 긴장감 넘치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영화 바깥에 한 편의 영화가 더 있는 듯한 설정은 영화의 세계관이 결코 짤막한 단편으로 한정되지 않음을 내보인다.
▲ 급한음끄기 스틸컷ⓒ 서울독립영화제
소음으로 생겨난 요상한 갈등이야기는 빌라 윗집에 사는 커플이 아랫집을 찾아가며 시작된다. 허름한 빌라, 관리하지 않은 집은 딱 보기에도 어딘지 수상한 구석이 적잖지만 커플은 무슨 용기인지 들어가 안을 살펴보겠단다. 아랫집에 사는 건 웬 남정네 둘인데 여자가 낀 윗집의 공세에 어찌할 수 없이 안을 허락하고 마는 것이다.
아랫집은 소음 따윈 없다고 하고, 윗집에선 도저히 시끄러워 못살겠다고 하는 기묘한 상황. 통상 들리는 발소리가 아닌 불편하게 들리는 주파수의 음이 사람을 미치게 한다고 주장한다. 들리지 않는 이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지만, 듣는 이는 괴롭다는 상황 속에서 남녀 커플은 집 안에 들어가 소리의 근원을 찾아 헤매기 시작한다.
영화가 진짜 새로워지는 건 이로부터다. 아랫집 사람들이 특정한 행동에 이상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윗집 사람들이 예기치 않은 행동을 할 때마다 아랫집 사람들의 반응은 괴상함을 넘어 기존의 물리법칙을 초월해 나아간다. 대단한 기술을 활용하지 않고도 자연스레 이를 연출한 솜씨 덕택에 영화는 일상 가운데서 SF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한국형 장르물의 격을 갖추게 된다.
▲ 급한음끄기 스틸컷ⓒ 서울독립영화제
일상으로부터 영화에 이르기까지작품은 아랫집에서 들려오는 어떤 음, 그 음이 절실한 사람들에 주목한다. 일상 가운데 일상적이지 않은 무엇이 끼어들 수 있는 여지를 탐색하고, 결국 그를 찾아낸 집념이 가상하다. 그로부터 한국형 SF의 가능성이 열리고, 다시 후반의 반전에 반전이 이어지는 클라이맥스를 통하여 작품은 장르물의 쾌감을 충실히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서울독립영화제가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급한음끄기>를 건져 새로운선택 섹션에 상영토록 한 것일 테다.
감독은 상영 후 이어진 관객과의 대화 자리에서 영화를 제작하기까지의 이야기를 전했다. 제가 직접 윗집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통에 고생을 한 적이 있다며, 이를 변주해 영화의 소재로 활용했다는 것이다. 김명선은 "(소리의 근원을) 라디오로 정한 건 이동이 가능한 용품이어야 하고, 특정주파수에서 (들려야 한다는 것 때문)"이라며 "일본에 놀러갔을 때 벌레를 퇴치하는 주파수가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 귀엔 안 들리면서도 내게는 잘 들려 놀란 적이 있었다"고 털어놨다. 제 경험이 고스란히 작품으로 이어진 것이다.
<급한음끄기>는 단편의 특성상 뿌린 모든 이야기가 수습에는 이르지 못함에도 장르적 쾌감을 충실히 전달한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영화다. 장편의 가능성을 충분히 따져볼 수 있고, 장르연출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 또한 얼마쯤 확인할 수 있다. 영화제 측은 이 영화에 대하여 죠 단테의 인상적 장르물 <환상특급>을 연상케 한다는 평을 남겼는데, 스티븐 스필버그가 총감독을 맡고 장르물에 재주 있는 여러 감독들이 돌아가며 단편을 감독한 이 작품의 일면이 일부 엿보인다 해도 좋겠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 없단 말이 널리 통용되는 요즈음이다. 그럼에도 익숙한 것 사이 치열하게 경계 너머를 모색하는 이들이 있다. 이제껏 나왔던 수도 없는 흔한 것들 사이에서 조금이라도 새로워지려는 노력, 바로 그것이 보는 이를 즐겁게 하는 창작의 미덕이 아닌가.
▲ 서울독립영화제 포스터ⓒ 서울독립영화제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