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의 씨네만세 907] 서울독립영화제 <그녀는 왜 사과를 따먹었을까>사회병리가 여전히 지속되는 이유도 시험능력주의가 학교 혹은 교육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 선발체제와 지배질서의 기본 축이기 때문일 것이다. (중략) 무엇보다 학력, 즉 시험 합격 능력을 가진 사람을 우대하고 그들이 국가기관이나 사회조직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도록 만드는 정치적 지배질서나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험능력주의가 학교, 학원만이 아니라 기업, 정부, 혹은 여러 사회조직이나 사회관계에서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하는 이유도, 사람들이 시험은 한국에서 입신출세를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길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김동춘, <시험능력주의> 중에서
한국에서 청소년기를 겪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졌을 법한 생각이 있다. 한 번의 시험으로 인생이 얼마간 정해진다는 것, 살아가며 수학능력시험이 삶의 전부일 수 없다는 깨달음을 가질 수는 있겠으나 수많은 시험이 그 자리를 얼마간 대체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시험으로부터 얻어진 타이틀, 말하자면 학벌이며 다니고 있는 회사, 직업 따위의 것들이 저의 격을 말하는 것처럼 으스대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또 그 정반대에서 그를 갖는 데 실패했다고 하여 한없이 기죽고 쪼그라드는 인간들도 있는 것이다.
▲ 그녀는 왜 사과를 따먹었을까 스틸컷ⓒ 서울독립영화제
시험으로 정해지는 세상, 과연 정의로운가한국의 어느 조그마한 다큐멘터리 감독이 제 영화를 상영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 뒤 말하기를 한 권의 책을 꼭 읽어달라고 하였다. 그건 다름 아닌 <시험능력주의>, 앞에 발췌하여 언급한 김동춘의 글이다. 책은 한국사회에서 시험이 차지하는 지나친 위상과 역할, 그로 인한 온갖 폐해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깨져나가지 않는 원인을 탐구한다. 말하자면 시험으로 표상되는 한국사회의 경쟁적 작동원리가 그 구성원의 그릇된 믿음으로부터 동력을 얻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그릇된 욕망과 믿음을 통하여 시험이 더 나은 인간을 선발할 수 있는 기준이라고 확고히 믿고 있다는 이야기다.
불행히도 한국사회는 대입은 물론, 입사와 그 이후에 이르기까지 한 번 시험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 커다란 장벽을 놓아두는 일을 자연스레 여기고 있다. 그 결과 중 하나가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가르는 요상한 틀이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이 우습게도 정규직이란 이유로 더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고 비정규직이란 이유로 더 험하고 고된 곳에 투입되는 경우를 허다하게 만난다. 비정규직에게만 주어지는 부당한 조치들이 자연스런 것처럼 여겨지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김예랑이 저의 이야기로 찍은 다큐멘터리 <그녀는 왜 사과를 따먹었을까>도 그런 경우를 다룬다.
앞서 연초 신진 다큐감독들의 등용문 역할을 자임하는 반짝다큐페스티발에 이 작품이 출품돼 화제가 된 바 있다. 발에 채이는 범상한 작품들 사이로 영화제가 추구하는 그대로 얼마쯤 반짝이는 구석이 있는 이 영화가 눈길을 끌었던 것이다. 계약직 여직원에게만 유니폼을 입히던 농협의 사례로부터, 직접 그 부당함을 호소하던 젊은 직원의 좌충우돌 이야기가 이 영화의 주된 얼개를 이루었다(관련기사:계약직 여직원만 유니폼 입는 회사, 총선 후보자는 '모르쇠').
▲ 그녀는 왜 사과를 따먹었을까 스틸컷ⓒ 서울독립영화제
그녀가 회사 앞 사과를 따먹은 이유농협 여직원이 사과를 따 먹은 이유, 그녀가 받아 마땅했으나 끝내 받을 수 없었던 대접을 회사 앞에 열린 사과를 무단으로 하나 따 먹음으로써 조금이라도 풀어내는 그 감각이 30여분의 영화를 보고 난 뒤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해진 것이다. 영화는 그로부터 공들여 만든 한국 독립영화가 걷는 통상적 여정, 즉 출품할 수 있는 가능한 많은 영화제를 두루 섭렵하며 연말 서울독립영화제 새로운선택 단편으로 상영되기에 이르렀다.
무엇이 그리 새롭느냐 되물을 수 있겠다. 연출의도부터 시작해 영화를 촬영한 방식이며 구성 등에서 이제껏 볼 수 없었던 새로움이 있느냐 묻는다면 답하기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 다큐에 한정해 보자면 직업인인 당사자가 제 직장의 부당함에 대하여 카메라를 치켜들고 촬영해낸 그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웠던 것도 분명한 일이다. 영화제 측은 섹션 설명과 관련하여 <그녀는 왜 사과를 따먹었을까>가 '다큐멘터리의 다양성을 제공'한다는 평을 붙이기도 했던 것이다.
감독 김예랑은 농협 계약직 직원으로 언젠가 농협에 정직원으로 입사하겠다는 포부를 가졌던 이다. 그러나 마음과는 달리 입사는 번번이 미끄러지고, 계약직 직원으로의 현실 또한 그녀의 눈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부당함이 널부러져 있다. 도대체가 시대가 어느 때인데 여자 계약직만 유니폼을 입어야 하고, 설거지를 비롯한 잡일이 제게 주어지며, 회사 시스템에도 직급이 아닌 계약직이란 신분이 눈에 띄게 박혀 있는가 말이다. 그와 같은 일상적 차별을 들고 밑바닥에서부터 하나하나 부딪는 과정이 이 다큐 <그녀는 왜 사과를 따먹었을까>의 중심을 가로지른다.
▲ 그녀는 왜 사과를 따먹었을까 스틸컷ⓒ 서울독립영화제
계약직에서 자영업자까지, 그녀의 변화물론 그와 함께 정규직 입사를 하면 모든 부조리가 단박에 해소되리란 흔한 입장을 세우고, 그러나 그 길이 생각만큼 만만치 않단 사실을 깨닫고 절망하는 이야기가 관객을 웃프게 하기도 한다. 마침내 감독은 그 많은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정규직 입사를 통해 언젠가는 웃으며 오늘을 바라보리란 인식이 안이하고 부적절하기까지 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로부터 이 영화는 그저 청춘의 힘겨운 한 때를 기록한 일기 수준을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사전에 잘 짜인 구성이나 관객을 뒤흔드는 통찰 담긴 장치가 있는 작품은 아니다. 그보다는 감독 김예랑의 삶이 진솔하게 담긴 기록물이라 보아야 할 테다. 고민과 설움, 좌절과 그럼에도 일어나야 하는 삶에 대한 희망이 담긴 기록, <그녀는 왜 사과를 따먹었을까>가 던지는 질문들은 한국사회가 시험이란 단순한 방식으로 구성한 체제가 어떠한 부당함을 일상 가운데 낳고 있는지를 일깨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감독 김예랑이 취업 대신 자영업을 선택해 지난 시간들을 보내왔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영화 상영 뒤 이어진 감독과의 대화 자리에서 "세달 전 와플대학이란 카페를 양도받아서 운영하고 있다"며 "계약직을 하다가 사장을 하니까 마음이 바뀐 부분이 있다"고 털어놨다. 그녀는 이어 "그 모습도 기록을 해야겠다 하고 지금 기록하고 있다"면서 "알바노동자 친구들이 다섯 시 시작인데 딱 다섯 시에 오고, 이런 게 개인적으로는 참 힘들었는데 그런 부분(도 영화에 담고 싶다)"고 설명했다.
말단 인턴 직원에서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하는 자영업자로의 변신, 김예랑이란 감독의 변화한 시선들이 또한 새로운 영화로 만들어질 참이다. 그녀는 다큐로써 제가 걸어온 지난 길에 서사를 부여한다. 그리고 그 서사가 한국의 현실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음은 물론, 긴밀히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그로부터 한국의 수많은 청춘, 나아가 모든 구성원들이 공감하고 또 통찰을 얻을 수 있는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매진하고 있는 것이다. 삶은 그렇게 영화가 된다.
▲ 서울독립영화제 포스터ⓒ 서울독립영화제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