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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 닥친 재개발 바람,아버지 세탁소를 팔 수 있을까

원천:3377TV   출시 시간:2024-12-17
[넘버링 무비 430]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인생세탁소> 제50회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인생세탁소> 스틸컷ⓒ 서울독립영화제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제주대학교 공동자원과 지속가능사회연구센터의 장훈교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19년 발간된 탐라문화 제60호에 실은 글 '제주 탑동 공유수면 매립 반대 운동'을 통해 제주 탑동의 모습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1987년 7월 매립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제주 탑동은 4백여 미터의 해안가에 '먹돌'이라고 불리는 검은 차돌이 깔려 있고, 제주 시민들이 '탑바리'라고 부르면서 즐겨 찾던 장소였다. 또한 해안 일대는 제 1종 공동어장으로 많은 해녀가 소라, 전복, 미역 등의 채취로 생활을 유지해 온 연안공동체의 공동관리자원이었다. 하지만 매립이 완료된 1991년 이후에는 5만 평의 시멘트와 아스팔트 부지로 변하고 말았다. 탑동 연안공동체의 주민과 제주 도민은 매립에 반대해 1988년부터 1991년까지 매립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영화 <마중>(2018), <사일의 기억>(2020) 등의 작품을 통해 제주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여온 문숙희 감독. 이번 영화 <인생세탁소>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자리는 '제주 탑동 사건' 혹은 '탑동 매립 반대 운동' 등의 명칭으로 불리고 있는 1988년도의 시기다.

극영화의 형식을 빌리고 있기 때문에 사건 전반의 정확한 정보 전달에 목적을 두고 있지는 않다. 다만 도시화로 쇠락한 골목, 꿈을 잃어버린 자신들, 노동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노모 등 극 중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이들을 압박하는 재개발의 욕망과 상처를 감추며 살아가는 이들의 희망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02.
"세탁소 넘기면 팔릴까 해서요."

어느 날, 하군 해녀 옥희(문희경 분)의 집으로 딸 은영(강진아 분)이 찾아온다. 손녀 예린까지 육지에 홀로 남겨두고서다. 남편에게 넘겨준 양육권을 되찾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한 상황이다. 제주에 머물며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고자 한다. 한편, 아들 경식(현대영 분)은 손자 준서를 집에 맡기고서 거리로 나선다. 밀린 공사 대금을 받기 위한 1인 시위를 하기 위해서다. 상황은 다르지만 두 사람은 모두 돈에 발목이 잡혀 있다. 과거 아빠가 운영했던 오래된 세탁소 하나가 떠오른다. 지금은 운영하지 않는, 먼지만 뽀얗게 내려앉은 가게다.

때마침 마을에는 재개발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어린 시절 은영과 경식이 삼촌이라 부르며 따랐던 성일(김유석 분)과 강 사장이 주도하는 사업이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에게는 일찍이 매립 사업의 결과, 콘크리트로 고향이 뒤덮이며 삶의 터전을 모두 잃어버린 경험이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시작된 또 다른 개발 계획이 반가울 리 없다. 당시 앞장서서 반대 운동을 펼쳤던 옥희는 더욱 그렇다. 돈을 위해 개발에 앞장서려는 이들과 마을의 현재 모습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 작은 세탁소를 손에 쥐고 있는 은영과 그의 가족 역시 각자의 입장 앞에서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 작품 <인생세탁소>에는 크게 두 가지 갈등 상황이 있다. 상황적으로는 마을의 재개발을 둘러싼 이해관계자들 사이의 다툼이다. 이 갈등 속에서 은영을 이용해 상권 개발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돌리려던 성일로 인해 옥희의 가족은 그 중심에 서게 된다. 하나뿐인 아빠의 유산, 세탁소를 두고 은근한 신경전을 벌이는 딸 은영과 아들 경식의 대립도 여기에서 시작된다(은영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자, 성일은 두 사람의 관계를 이간질하기 시작한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관계적 갈등이다. 문숙희 감독은 작품 속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 사이에 갈등으로 비화될 수밖에 없는 서사들을 빼곡히 채워 넣고 있다. 엄마 옥희와 딸 은영, 다시 엄마 옥희와 아들 경식, 그리고 은영과 경식 사이의 갈등처럼 한 가족 내에서도 이들 모두는 감정적으로 대립하고 있다.

 제50회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인생세탁소> 스틸컷ⓒ 서울독립영화제
03.
그중에서도 엄마와 딸 사이의 오래된 감정은 이 영화를 지지하는 하나의 중요한 서사다. 두 사람은 가족이지만 혈연으로 이어진 관계는 아니다. 옥희는 은영의 새엄마다. 가정을 버리고 떠난 친엄마의 자리를 대신해 왔다. 경식 역시 옥희를 따라 이 집에 들어왔다. 은영은 옥희가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갔다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에 그가 자신을 부엌데기 취급이나 했다고 믿고 있고, 육지로 가기 위해 악착같이 공부했던 자신 대신 친아들만 서울에 보낸 일에 대해서도 억울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자신을 버리고 떠난 친엄마에게 지금까지 돈을 갖다 바친 이유도 어쩌면 여기에 있는지 모른다. 어떤 방법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사랑의 충족. 그 사랑은 스스로는 발전시킬 수 없는, 관계로부터 시작되는 종류인 것이다.

옥희는 단 한 번도 은영의 오해처럼 편애하거나 함부로 대한 적이 없다. 할 만큼 최선을 다했고, 다른 뜻은 가져본 일이 없었다. 아들을 서울에 보낸 일 역시 입시 때문이 아니라 치료 때문이었으며, 당시 섬을 떠나고 싶어 했던 딸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싶지 않아 나름대로 배려했던 것으로 은영의 오해다.

40년 물질을 하고도 하군에 머물 정도로 물을 무서워하면서도, 매일 악몽과도 같은 바다로 나갔던 것 역시 가족을 위한 희생에 가까웠다.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자리에 대한 책임 같은 것. 그와의 첫 만남에 남겨진 추억, 매립지 보상금으로 받은 돈을 빌려준 일과 그 돈을 전부 갚을 때까지 한 번도 빠짐없이 찾아온 남편의 마음을 닮았다.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은 이제 아빠의 유산인 세탁소로 이어진다. 다시 문을 열고 조금만 잘 운영하면 권리금을 받고 가게를 넘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은영과 그런 일에 대한 마음은 조금도 갖고 있지 않은 옥희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딸은 겉으로나마 가게를 다시 정리해 세탁소를 직접 운영하고자 하는 뜻을 보인다. 어차피 그동안 받은 것도 없으니 이번 기회에 자신의 몫이라도 챙겨야겠다는 마음이다.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엄마는 그 모습을 지켜본다.

04.
"이런 곳이 있어야 우리 같은 사람들이 숨을 쉬는데."

이처럼 여러 갈등 상황이 제시되며 극이 나아가는 도중에 감독의 믿음처럼 자리하는 장면들이 있다. 과거의 유산을 바라보는 단정한 태도와 애틋한 마음이 담긴 자리다. 아빠가 남긴 세탁소를 기억하는 마음이 대표적이다. 돈으로만 평가되는 지금과 달리 보이지 않는 여러 의미가 있었던 공간. 마을 사람들의 사랑방이기도 했고, 누군가의 안식처이기도 했던 곳. 어떤 이는 아빠의 손길이 닿은 옷을 입고 운수 대통을 했다고도 했다. 켜켜이 쌓인 시간과 오랜 시간 한 자리를 지키는 공간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면 영원히 찾을 수 없는 것들이다.

편의점, 자전거, 딱밤 내기 등의 소재를 통해 의부 조카인 준서와 은영이 만들어가는 시간 또한 마찬가지다. 이 장면들은 영화의 차가운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하나의 움막처럼 느껴진다. 이 순간들은 인물 사이의 유대 관계를 쌓아가기 위한 과정이기도 하지만, 혈연을 넘어서는 가족의 의미를 되찾고 날을 세우던 이들이 잠시나마 평온을 되찾을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관객들에게는 한숨 돌리며 작은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순간이 된다.

대비(對比)다. 이런 장면들이 있기 때문에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현실의 문제들이 더욱 또렷하게 그려진다. 탑동의 개발과 매립에 맞서 싸운 이들이 있기에 그 일이 문제가 될 수 있었던 것과 동일하다. 결과적으로 어떤 장면을 마주하게 되는가 하는 문제와는 별개다. 어느 것도 맞서 세워지지 않은 곳에는 그저 사라지는 일밖에 남지 않는다.

 제50회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인생세탁소> 스틸컷ⓒ 서울독립영화제
05.
끊임없이 이어진다. 삶의 찬란한 순간도, 불안하고 안타까운 순간도. 어느 하나 영속하지 못하고 자리를 바꿔가며 아우성을 친다. 저 갑옷이 욕심만 덕지덕지 묻은 자신의 모습 같다며, 은영은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에 엉덩이를 퍼지르고 앉아 목 놓아 운다.

이제 와 자신의 욕심을 부끄러워하고, 아버지가 남긴 세탁소와 마을 어귀의 풍경을 지키려고 하는 것은 단순히 마음을 달리 먹어서가 아니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것으로부터 깨닫고 체득하며 삶의 의미를 써 내려갈 수 있게 된다. 은영도 이제 안다. 지켜낼 수 없어 떠나보내야 하는 일이 있다면, 떠나보내지 않기 위해 지키고자 애를 써야 하는 일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 작품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소재 가운데 하나인 풋감으로 염색한 갈옷에는 그런 우리의 삶이 고여 있다. 오랜 시간 땅속에서 숨 쉬고 난 뒤에야, 오랜 세월을 입고 입을수록 제 색을 찾아가는 모습이 그렇다. 개발과 변화의 시대에서 빠르게 변하는 일 이면에 존재하는 이야기들이 이 영화 <인생세탁소> 속에 녹아 있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관객들 모두가 잠깐이나마 자신이 지나온 시간과 머물던 장소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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