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봄' 만든 영화계에 감사"... 윤석열 내란 이후 국민과 함께 연대한 영화계14일 오후 5시 국회에서 윤석열 탄핵안 가결이 발표되는 순간 자리에 앉아 있던 영화인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환호성을 지르며 서로를 얼싸안거나 일부는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이날 영화인들은 14일 별도의 장소를 지정해 함께 모였는데, 12시부터 여의도 산업은행 뒤편의 한 빌딩 앞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영화 < 1987 > 장준환 감독과 문소리 배우 부부를 비롯해, 이명세 감독, 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 이동하 대표, 여성영화인모임 김선아 대표, 한국예술영화관협회 최낙용 대표, 한국독립영화협회 백재호 이사장, 서울독립영화제 김동현 집행위원장, 전주국제영화제 문석 프로그래머,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모은영 프로그래머, 부산영화제 아시아필름마켓 김영덕 운영위원장, 김조광수 감독,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 김승환 프로그래머, 인디스페이스 원승환 관장 등 많은 영화인이 한자리에 모여 탄핵 가결을 외쳤다. 박찬욱 감독은 이들을 위해 빵을 제공했다.
▲ 지난 14일 여의도에서 윤석열 탄핵 가결에 기뻐하고 있는 이명세 감독.ⓒ 성하훈
▲ 지난 14일 여의도 집회에 나온 장준환 감독과 문소리 배우.ⓒ 성하훈
12.3. 계엄 이후 주목받는 한국영화12.3 윤석열 내란 사태 과정에서 한국영화의 역할이 주목받고 있다. 내란 발생 직후 영화계는 일사불란한 자세로 내란 규탄에 동참했다. 두 차례에 걸쳐 규탄 성명을 냈는데, 2차 영화인 성명은 지난 12일 마감됐다. 이 과정에서 시한을 놓친 조진웅 배우와 박해일 배우가 추가 연명을 강력히 요청했을 만큼 영화인들의 참여는 적극적이었다.
탄핵이 가결된 14일 당일, 오전부터 국회 앞에서 시작된 윤석열 체포와 탄핵 결의를 촉구하는 문화예술인 시국선언에 참여해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원승환 인디스페이스 관장은 이 자리에서 "윤석열 넌 이제 끝났다"라고 외치기도 했다.
블랙리스트 시절보다 더 후퇴한 영화제 예산 삭감을 비롯해 지역 영화 예산 폐지, 서울독립영화제 예산도 전액 없애는 등 영화 환경이 악화된 것도 이날 영화인들에게 동력을 제공했다. 영화계는 이를 제 2의 블랙리스트로 규정하고 있다.
특히 내란 과정에서 문화체육관광부가 한국예술종합학교를 폐쇄했다는 소식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문화예술단체들은 유인촌 장관이 내란에 동조했다며 16일 경찰에 고발장을 접수했다(관련기사 : 문화예술계 "계엄 당일 한예종 출입 통제 밝혀라" 유인촌 장관 고발).
"<서울의 봄> 만든 영화계에 감사" ▲ <서울의 봄>을 촬영 현장의 김성수 감독ⓒ 하이브미디어코프
특히 영화 <서울의 봄>은 내란 사태 과정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고 있는 영화로 내란을 막는데 일조한 공신으로 꼽힌다. 한 누리꾼은 SNS에 "대한민국 영화계에 깊이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며 "<서울의 봄> 1천만 관객이 없었다면 비상계엄 선포가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이해하고 즉각 행동에 나섰을 젊은 세대는 없었을 거라 감히 말씀드린다"고 소회를 밝혔다.
<말아톤> <대립군> 등을 연출한 정윤철 감독은 "이번 용산의 친위 쿠데타가 천만다행으로 실패한 원인을 따져볼 때 영화 <서울의 봄>의 영향 또한 적지 않을 것 같다"며 "딱 1년 전 개봉한 이 영화는 1979년 12월 12일, 비상 계엄하에서 벌어진 군사반란과 그 비극성을 실감나게 그렸고, 천만 이상의 관객들이 독재권력의 참혹한 탄생과정을 목격했다"고 분석했다. 정 감독은 이어 "그 결과 이번 비상계엄 또한 먼 과거의 추상적 의미가 아닌 영화 속에서 막 튀어나온 스토리텔링의 연장선에서 곧바로 심박수 BPM을 치솟게 했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그는 "2024년 12월 3일, 타임슬립을 한 듯 갑자기 영화 속 반란군이 된 21세기의 군인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라며 "정의와 불의, 명령과 양심의 갈등 속에서 그들은 급조된 비상계엄 시나리오대로 따르거나, 단순한 조연으로 머물지 않고, 각자 인격과 윤리를 지닌 민주주의 국가의 실존적 주체로서 행동하려 노력했다. 그 결과 비극적인 <서울의 봄>과는 다른 결말이 나오는 데 일조했다"고 설명했다.
스크린으로 일깨운 내란의 이면 ▲ 지난 14일 국회의 윤석열 대통령 탄핵 가결에 환호하는 영화인들ⓒ 성하훈
44년 만의 내란을 무산시키는데 필요한 역할을 한 한국영화의 바탕에는 한국영화운동이 존재한다. 44년 전인 1980년 광주학살의 부채감을 안고 꿈틀대기 시작한 영화운동은 영화를 통해 세상을 바꾸고자 노력했다. 대표적으로 <오! 꿈의 나라>는 1980년 내란 과정에서 큰 고초를 겪은 광주에 대한 이야기였다.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영화의 주도세력으로 부상한 진보적 영화인들은 노무현 정부 때는 이라크 파병 반대 투쟁에 나서기도 했으며, 이명박-박근혜 정권으로 이어지는 블랙리스트 시기에는 온갖 압박에도 굴복하지 않고 거세게 저항했다. 윤석열 정권이 들어서면서 제2의 블랙리스트 시대가 왔으나, 영화인들의 분노만 끓어오르게 할 뿐이었다.
한국영화운동의 선구자로 불리며 민중영화를 지향했던 홍기선 감독은 1994년 출간된 <한국의 영화감독 13인> 1(이효인 저, 열린책들)에 실린 인터뷰에서 "인간사회가 개선될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영화는 할 일이 있는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변했다.
"자본주의라는 사회가 인간을 개인화시키고, 경쟁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 사회는 더욱더 악화될 것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인간성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아야 할 것이며 영화는 바로 그러한 희망에 관해 말하는 것입니다."
그의 말대로 영화는 희망을 안겨줬다. 탄핵 가결 다음 날인 지난 15일은 고 홍기선 감독이 8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