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영화 <모든 것은 아르망에서 시작되었다>(*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모든 것은 아르망에서 시작되었다>(원제 Armand)는 제77회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공식 초청된 데 이어 그해 가장 뛰어난 데뷔작에 수여하는 '황금카메라상'을 받았다. 노르웨이 감독 하프단 울만 톤델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데,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놀랍도록 인상적이고 커다란 반향을 만들어낸다"(The Hollywood Reporter), "놀라운 재능을 가진 신인 감독의 탄생"(Loud and Clear Reviews) 등 호평을 받았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2022년)의 레나테 레인스베가 주연과 제작을 맡았다.
진실영화는 도로를 질주하는 차량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카메라가 차량을 뒤쪽에서 포착해 속도감과 불확실성을 암시한다. 마지막 귀가 장면과 대조를 이룬다. 긴장하고 당혹한 분위기의 엘리자베스(레나테 레인스베)가 아들 아르망의 학교에 도착해 6살에 불과한 아르망이 '학폭'의 가해자로 지목됐다는 얘기를 들으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모든 것은 아르망에서 시작되었다>의 작업 방식이 흥미로운 대목은 영화의 모든 것을 촉발한 아르망과 친구 욘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을 미궁에 빠뜨려 놓고 내버려둔다는 사실이다. 실제 폭행이 발생했는지를 보여주지 않고 사건에 관한 주장만을 보여준다. 아키라 구로사와 감독의 <라쇼몽(羅生門>(1950년)을 연상시키는 전개인데, <모든 것은 아르망에서 시작되었다>는 진실과 허위, 혹은 인식에 관한 성찰을 한두 겹 더 감았다. <라쇼몽>이 동일한 사건을 여러 등장인물의 시각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풀어내는 독특한 서술로 유명하다면 이 영화는 사건과 무관한 등장인물들이 사건을 재구성한다는 차이를 보인다. 모든 것이 아르망에서 시작했지만 정작 아르망은 베일 저편에 위치한다.
사건 당사자로 지목된 6살의 두 소년은 나오지 않고, 아르망만 마지막에 수동적인 모습으로 대사 없이 잠깐 등장한다. 폭행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영화 초반 아르망의 진술도 당사자가 아닌 대리인인 엄마 엘리자베스를 통해 전해진다. <라쇼몽>이 보여주었듯, 같은 사건도 당사자의 입장에 따라, 의도에 따라, 또 착각에 따라 상이한 진술이 흔히, 공공연하게 일어난다. <모든 것은 아르망에서 시작되었다>에서는 당사자의 대리인들이 당사자들의 사건을 대신 진술하며, 더구나 당사자가 6살짜리 아이로 설정돼 있어 진실 추구의 한계가 본원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실제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를 끝내 묘사하지 않는 게 이 영화의 특징이자 강점이다. 많은 영화에서 그러하듯, 논란과 오해를 보여준 뒤에 실제 사건을 보여주는 반전 또는 해소가 가능하지만 감독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진실 자체보다는 진실을 향하는 인간의 모습에 주목했다.
극 중에서 각자의 이해관계가 존재하는 여러 등장인물을 통해 무엇이 진실인지를 두고 경합하면서 곧바로 어떻게 진실을 다룰 것인지를 함께 거론해 사태의 혼란이 가중된다. 원론상 '무엇'이 확정돼야 '어떻게'가 나오지만 현실에서 흔히 목격하듯 '무엇'에 앞서 '어떻게'가 먼저 거론되기도 한다. '무엇'이 명명백백하게 던져져 있지 않다면, '어떻게'가 '무엇'을 대체해 어쩌면 '무엇'을 새롭게 산출하는 상황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러한 왜곡이 현실에서 많이 일어난다.
권력 투쟁의 결과 ▲ <모든 것은 아르망에서 시작되었다>ⓒ 잔잔
그러나 예컨대 12·3 윤석열 내란 사태처럼 비교적 많은 사실이 공중에 노출됐다면, '어떻게'의 논의가 급박하게 이루어질 필요성이 있다고 해도 '무엇' 자체를 뒤바꿀 수는 없다. 물론 잠시 '무엇'을 덮어버릴 수는 있다. 진실이라는 것이 말 그대로 진실이라기보다 권력투쟁의 결과이며 이해관계의 조정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교장을 비롯한 교사들의 편의주의와 관료주의 행태를 비롯해 욘의 부모, 담당 교사, 동료 교사 학부모 등은 각자의 편견과 입맛에 따라 사건을 해석하고 확산하며 사건의 실체가 수렁에 빠진다. 영화에서 설득력 있게 그렸듯,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실제로 중요한 것은 진실을 대하는 각자의 입장과 이해(利害)다.
영화에서는 그러나 왜곡의 수렁에서 진실이 구해지면서 사필귀정하는 양상이 나타난다. 사건 자체가 비교적 단순하고 경미한 데다 엘리자베스의 나름의 책략이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꼭 진실이 구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시사를 남긴다.
하프단 울만 톤델 감독은 "이 영화는 우리가 사람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작은 정보의 파편만을 활용하는지에 관한 것"이라며 "이 영화는 두 어린 소년의 갈등에 관한 것이기보다 성인으로서 우리가 각자의 정체성과 삶에 맞춰 어떻게 현실을 구성하는지를 이야기한다"라고 말했다. 타당하게도, 진실은 구성되는 것이라는 직관적 인식이 그에게 있다.
▲ <모든 것은 아르망에서 시작되었다>ⓒ 진진
감각적 연출영화는 공간 사용이 제한적이다. 학교라는 한정된 공간을 활용해 갈등과 대립을 보여주는데, 시각적으로 생동감 넘치는 실내극(chamber play)처럼 느껴지게 하려고 했다는 설명이다. 한정된 공간의 실내극 분위기다 보니 음향이 심리 묘사나 극 전개에 적잖게 기여했다.
현대 무용의 활용이 돋보인 지점이었다. 느닷없는 현대 무용의 등장은 분위기를 환기하며 영화의 매력을 높인다. 감독은 첫 번째 춤 장면은 엘리자베스의 정신 상태를 보여주면서 전형적인 서사에서 벗어난 긴장의 장치라고 말했다. 두 번째 춤 장면은 확실히 상징적이고 실제로 현대무용 공연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초반에 투 샷에 해당할 만한 대치 장면을 그린 방식에서도 초점 등 카메라워크를 통한 감각적인 접근을 볼 수 있었고 엔딩에 다가가며 연출한 빗속의 장면은 대사 없이 움직임만으로 결말을 짓는 방식이어서 젊은 감독의 재능을 엿볼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히스테릭하게 웃는 장면을 한계까지 밀어붙이는 등 곳곳에서 패기와 도전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영화이다.
안치용 영화평론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르몽드디플로마티크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