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파라다이스 이즈 버닝>어쩌면 배부른 소리로 치부될지 모르지만, 풍요와 안정의 상징이던 서구 복지국가 시스템이 무너지고 있다는 경고는 이미 한참 전부터 여기저기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혹자는 좌파 정권이 무리하게 난민을 수용하고, 대책 없이 이민자를 받아들인 까닭이라 하고, 누군가는 이상론적인 기후위기와 탈원전 등 비현실적 이념 우선 정책 때문이라 주장한다. 또는 중국 같은 나라에서 헐값에 덤핑으로 저가 상품을 쏟아내는 바람에 산업 경쟁력을 상실한 게 근본 원인이라 말한다. 이유가 무엇이든 오랜 세월 시행착오를 겪으며 서구가 달성한 현존하는 가장 안정된 체제가 위기에 봉착한 건 이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물론 시리아나 가자, 아프가니스탄에 비하면 여전히 '1세계'라 불리는 이들 나라의 위기와 빈곤은 상대적으로 보일 테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징후를 노출해 온 현 상황은 일시적 침체라 보기엔 어렵다. 그 반작용으로 계급 타협과 적정 분배를 통해 유지되던 정치적 안정이 위협을 받고, 극우화가 노골화됐기 때문이다. 공동체 사회 토대가 무너지는 바람에 발생한 시스템 붕괴의 위기다. 정책과 제도적으로 이런 세태를 우려하는 작품이 매년 영화제에서 주목받는 건 다 현실의 반영인 셈이다.
여기에 독특한 결을 지닌 작품군이 추가된다. 켄 로치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처럼 제도의 모순과 사회적 연대를 강조하는 흐름과 달리, 실제 위기에 노출된 이들의 다채로운 풍경을 그려내는 유형이다. 그저 가련한 희생자로만 객체화하지 않는 대신, 억지 낙관주의와도 선을 그으며 현실의 단면을 섬세하게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시스템 붕괴 틈새에선 예측하기 힘든 다양한 풍경이 펼쳐지게 마련이다. <파라다이스 이즈 버닝>은 그런 계열의 최전선에 선 작품 중 하나다.
사회복지제도와 전통적 가족 형태, 그 빈틈에 자리한 세 자매 ▲ 영화 <파라다이스 이즈 버닝> 스틸 이미지ⓒ ㈜트리플픽쳐스
북유럽 스웨덴에도 무더운 여름은 존재한다. 아이들은 간편한 차림으로 산과 들을 뛰어다니고, 물에 첨벙 뛰어들곤 한다. 만물이 생기가 넘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모험을 즐길 준비가 되는 시간이다.
그 가운데 또래 아이들과 어울려 망아지처럼 즐겁게 노는 세 자매가 있다. 깡마르고 작은 체구이지만 강한 눈빛을 지닌 16살 '로라', 나이에 비해 성숙한 외모이지만 천진난만한 표정의 12살 '미라', 그리고 모든 게 그저 즐겁고 신기한 7살 막내 '스테피'다. 친한 소녀들과 함께 또래 집단을 이룬 그들은 수영장에서 피서를 즐기며 음악을 틀고 춤을 춘다.
여기까지만 보면 여름철 한때의 즐거운 놀이로 보인다. 곧 상황은 뒤집힌다. 소녀들이 즐겁게 물장구를 치던 근사한 별장은 사실 주인이 따로 있었다. 난장판이 된 집 꼴과 이 사단을 만든 침입자들에게 잔뜩 화가 난 집주인은 불청객들을 붙잡아 혼을 내겠다며 이리 뛰고 저리 뛴다. 아이들은 혼비백산해 사방팔방 도주한다. 이 역시 그저 유희에 불과해 보인다. 잘 도망쳤는지 확인하면 그뿐이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듯하다.
세 자매는 귀가한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다. 아이들을 혼내거나 돌봐줄 어른의 부재다. 첫째 로라가 동생들에게 밥을 먹이고, 둘째 미라는 엉망이 된 막내 스테피를 욕실로 데려간다. 큰언니가 지시하면 각자 분담해 집안일을 대충 처리하고 잠자리에 든다. 부모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관객은 궁금할 수밖에 없지만, 부모는 애초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흔적도 없다.
수상한 건 그뿐이 아니다. 세 자매의 일상은 세상의 규범과 한참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빨래를 급히 해야 하는데 세제가 떨어졌다. 당연히 미리 준비해두거나, 혹은 사서 쓰면 될 일이다.
로라는 이른 아침에 이웃집 문을 쾅쾅 두드리거나, 빨래방에서 남의 세제를 슬쩍하려 한다. 마트에 가서 카트에 먹거리를 구매하지만, 결제하는 대신 막내가 소동을 피우는 틈에 재빨리 빠져나가는 식이다. 어른의 부재, 좀도둑질이 버릇처럼 된 아이들, 책임감 강한 이들이라면 세 자매를 어떡하면 좋을지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릴 만하다.
대체 이웃과 공공기관은 뭐 하는 거냐며 화살을 돌릴법도 하다. 뻔뻔한 이들 자매의 요구를 이웃집은 그런대로 잘 들어주는 모양새다. 그리고 집에 전화가 걸려온다. 아이들이 잘 지내는지, 부모 면담 겸 가정 방문을 오겠다는 사회복지국 담당자로부터 연락이다. 첫째 로라가 최근에 학교 무단결석을 저질러 상의할 겸 직접 찾아오겠단 것이다.
그동안 계속 핑계를 대며 거절해 왔지만, 이번엔 빠져나갈 구석이 없다. 다음 월요일로 시간은 정해졌다. 그런데 부모는 등장할 기미가 없다. 미성년자 세 자매가 집에 방치된 채라면? 당연히 제대로 된 공공기관에서 아이들을 시설로 보내거나 위탁을 알아볼 테다. 자매들은 그걸 원하지 않는다. 뾰족한 수는 없다. 과연 일주일 후 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불쌍한 아이들을 넘어 캐릭터 형상화하기 ▲ 영화 <파라다이스 이즈 버닝> 스틸 이미지ⓒ ㈜트리플픽쳐스
▲ 영화 <파라다이스 이즈 버닝> 스틸 이미지ⓒ ㈜트리플픽쳐스
영화는 임박한 위기에 직면한 세 자매의 며칠간을 다룬다. 하지만 사회복지제도의 명암을 다루려는 방향과 작품의 태도는 한참 거리가 멀다. 대신에 그들이 처한 기본적인 상황 좌표만 관객에게 입력한 뒤, 그런 배경 아래 주인공 세 자매가 어떻게 일상을 보내는지, 질풍노도의 시기에 접어든 여자애들이 겪는 불가역적 변화에 관한 세밀한 묘사를 선보이는 데 집중한다.
16살 로라는 외부에 적대적이고 센 척하는 소녀다. 아직 어른이 되려면 한참 멀었지만, 동생들에겐 가장 노릇을 하는 존재다. 술과 담배가 자연스럽고, 곳곳에 현란한 문신을 자랑한다. 거칠고 퉁명스럽지만, 동생들을 세상 무엇보다 아끼고 책임지려는 태도가 역력하다. 부모의 공백 속에서 혈육을 지키는 게 유일한 임무인 것처럼 몰두한다. 이를 위해선 도둑질도 거짓말도 물리적 폭력도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로라가 내 동생 건드리면 몇 배로 보복하겠다는 태도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영화 내내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어린 나이에 스스로 짊어진 무게를 온전히 감당하기란 불가능하다. 며칠 앞으로 닥친 위기를 모면할 궁리를 혼자 뒤집어쓴 채 동생들에게 말하지도 못하고 냉가슴만 앓는 중이다.
12살 미라는 딱 중간에 낀 처지다. 막내는 아직 천진난만하고, 언니는 예전처럼 자신에게 전념하지 않는다. 무슨 고민이 많은지 혼자 죽상이거나, 일이 있다며 어린 동생 돌보라며 홀연히 사라지기 일쑤다. 이제 막 첫 생리를 하면서 급격한 변화도 당황스럽다. 티격태격하긴 해도 동생들에게 무한 애정을 뿜어내던 언니가 이젠 그저 막내 보모로만 자신을 대하는 것 같다. 나도 언니에게 기대고 싶은데 명령만 하고 돌봐주지 않는다. 미라는 속상하다. 어느새 그 아쉬움은 분노로 변환된다.
7살 스태피는 언니들이 엄마처럼 돌봐준다. 그들에 의지하면서도 막내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넘친다. 요즘 유치가 한창 빠지기 시작한 것도 생경한 상황이다. 고작 몇 살 더 먹은 것뿐인데 언니들은 자꾸만 자기를 놔두고 딴짓을 한다. 나도 뭐든 할 수 있는데 무시당하는 기분이다. 그렇지만 막상 뭘 할 수 있을까? 세 자매는 자연스럽게 성장해가며 자기만의 고민에 빠지고, 눈빛만 봐도 다 알 것 같던 그들의 속내에 균열이 일어난다.
있는 그대로 응시하는 태도의 영화 ▲ 영화 <파라다이스 이즈 버닝> 스틸 이미지ⓒ ㈜트리플픽쳐스
분명히 영화는 결손가정의 위태로운 세 자매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비록 가난하고 대책 없이 살아도 아이들의 일상은 초여름 날씨의 질감처럼 시끌벅적하고 흥겹다. 마치 달동네 골목에서 서로 뒤섞여 뛰어놀던 과거 세대 풍경처럼 말이다. 또래 친구들도 대충 자매들과 처지가 별반 달라 보이지도 않는다. 어떤 소녀는 10대에 배가 불룩하고, 음주·흡연은 자연스럽다. 함께 무단침입해도 금품 도둑질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자신들에게 없는 걸 일시적으로 경험하면 족할 따름이다. 어릴 적 고약한 장난질이나 수박 서리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심리다.
냉정하게 바라보면 세 자매의 일상은 누구나 당연하게 여기는 제도교육과 공공 시스템 외부에 방목되는 것과 별로 다를 게 없다. 말 그대로 현대 사회 구석에 '야생의 아이들'이 방치된 채 그들만의 소우주를 구성한 격이다. 세계적인 복지제도로 알려진 스웨덴 한복판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니 하고 당황해할 관객이 적지 않을 테다. 저 아이들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장기적 안목으로 본다면, 세 자매의 현 상태는 계속되면 안 될 노릇이다. 늦게라도 사회보장국이 제 역할을 책임져야만 한다고 다들 생각할 테다.
그런데 아이들의 자매애가 비온 뒤 땅 굳어지듯 성장통과 함께 찾아온 시련과 오해를 통과하며 한층 더 굳건해지는 형국을 지켜보면, 과연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대책이 과연 최선일지 고심하게 된다. 물론 위태롭고 안쓰러운 건 어쩔 수 없지만, 부모의 부재를 견디기 위해 똘똘 뭉친 아이들의 자매애를 해체하는 게 어떤 결과로 드러날지 자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월요일 어느 순간, 세 자매의 요새 대문을 누군가 두드릴 테다. 성실한 공무원이라면 당연히 아이들을 '보호'할 제도적 절차를 진행해야 한다. 하지만 그의 직무수행은 세 자매가 구축한 최소 공동체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치닫는다.
영화는 '그들만의 낙원'을 구축한 세 자매와 또래 집단의 눈부신 하루, 그 주변에 깃든 붕괴의 전조를 혼란할 정도로 현란하게 그린다. 새로운 인연과 뜻하지 않은 이별, 도래하는 파국과 부둥켜안고 방어하려는 피붙이들의 본능이 발랄한 배경음악과 함께 기묘한 감각으로 관객에게 접근한다. <자전거 탄 풍경>, <플로리다 프로젝트> 같은 영화가 자연스럽게 떠오르며 우리 곁의 사각지대 처한 이웃들, 제도 탓만으로 불충분한 현실 쟁점들을 저절로 소환하는 작업이다.
절박한 현실을 아이들의 생동감으로 채우는 그들만의 '유토피아'는 붕괴할 운명이지만, 자매들이 보여준 생기가 고난을 헤쳐갈 힘이 되길 기원하게 만드는 영화다.
[작품정보]파라다이스 이즈 버닝
PARADISE IS BURNING(원제: PARADISET BRINNER)
2023|스웨덴|드라마
2024.12.18. 개봉|108분|청소년관람불가
감독 미카 구스타프슨
출연 비앙카 델브라보, 딜빈 아사드, 사피라 모스버그, 이다 엥볼
수입 몽상
배급 ㈜트리플픽쳐스
2023 80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오리종티 감독상&40세 이하 작가상-각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