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하얼빈’에서 안중근(현빈)은 뜨거운 슬픔과 고뇌를 드러내지 않고 안으로 삭인다. 정적인 독립투사 안중근은 그렇게 탄생했다. CJ ENM 제공■ 영화 ‘하얼빈’ 내일 개봉
치열한 액션 장면 비중 줄이고
내면의 고민·의심·두려움 조명
극단적 명암대비로 연극적 연출
러시아·몽골 자연 ‘압도적 풍광’
상업영화 공식 과감히 버렸지만
인물 탐구의 깊이는 떨어지기도안중근이 얼어붙은 두만강을 지난다. 그는 매우 지쳐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자연 속 인간 안중근은 초라해 보이지만, 묵묵히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긴다. 여기엔 우리가 아는 영웅 안중근은 없다. 독립투사의 강렬한 분노도 느껴지지 않는다.
우민호 감독의 영화 ‘하얼빈’(24일 개봉)은 대다수 관객들의 기대를 아마도 배반한다. 안중근은 행동하기보단 고뇌하고, 독립군의 항거는 통쾌함 없이 처절하다. 신파 하나 없이 차분하고 건조하게 당시 20∼30대에 불과했던 안중근과 독립군 동지들을 응시한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현빈)이 하얼빈으로 가서 ‘늙은 여우’ 이토 히로부미(릴리 프랭키)를 처단한다는 것. 거사에 성공하기까지 과정은 그리 치밀하게 그려지지 않았다. 안중근은 우덕순(박정민)을 비롯한 동지들과 조력자 최재형(유재명)의 도움을 받아 우여곡절 끝에 하얼빈에 이른다. 안중근의 능력도 부각되지 않는다. 도리어 인간을 믿고 도의를 지키는 그의 성향은 동지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위기를 자초한다.
CJ ENM 제공영화가 관심 있는 건 안중근의 영웅적 행보가 아닌 두려움을 느끼는 연약한 인간 안중근의 내면이다. 자연히 이들이 활약하는 순간보단 어두운 골방에서 토론하고, 번민하며, 서로를 의심하는 순간이 많다. 일본군이 밀정을 심었다는 정황이 드러나면서 첩보물의 성격까지 띤다. 건조하고 차갑지만, 그 안에 잠재된 뜨거운 분노를 담아내며 프랑스 누아르 거장 장 피에르 멜빌의 영화나 김지운 감독의 ‘밀정’을 연상시킨다. 우 감독은 지난 19일 인터뷰에서 “안중근과 독립군 동지들의 마음이 들리지 않는 통곡처럼 느껴졌다”며 “이들의 마음을 묵직하게 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극단적인 명암 대비가 많아 연극적이라 느껴진다. 밀정의 존재로 하얼빈 작전이 무산될 위기에서 안중근이 최재형을 붙잡고, 끝까지 작전을 수행하겠다고 절규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방구석 어둠 속에 있던 안중근이 무릎을 꿇고 고해성사하듯 최재형을 설득할 때 창가를 통해 서광이 비친다.
‘하얼빈’에서 안중근은 초인이 아니다. 동지들에게 도움을 받고 최재형을 정신적으로 의지한다. 다만 먼저 떠난 동지들의 몫을 산다는 부채의식과 국권 회복을 위한 집념으로 결국 사지의 길로 다가선다. 우 감독은 “이제까진 단독 클로즈업을 자주 썼는데, 이번 영화는 안중근 홀로 두드러지게 보이면 안 됐다”며 “안중근과 동지들이 함께 있는 모습을 많이 담았다”고 설명했다.
홍경표 촬영감독이 담은 자연 풍광은 압도적이다. 동양과 서양이 맞물렸던 세기말의 블라디보스토크를 라트비아에서 찍었고, 만주의 허허벌판을 담기 위해 몽골을 내달렸다. 우 감독은 “숭고하게 찍고 싶었고, 한 폭의 명화처럼 보이길 바랐다”고 강조했다.
CJ ENM 제공‘우민호 스타일’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하얼빈’을 보며 당혹스러울 것이다. 상업성 짙었던 기존 스타일과는 반대로 가기 때문이다. 자극을 쫓던 이야기꾼이 윤리성을 고민하는 그림쟁이가 다 됐달까.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장면을 부감(높은 곳에서 내려다봄)으로 찍은 게 대표적이다. 그 때문에 억눌린 울분을 분출하며 카타르시스를 안겨야 할 법한 하얼빈 서거 장면이 흐지부지 지나간다는 인상을 준다. 우 감독은 “먼저 세상을 떠난 동지들이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찍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일반적으로 대중이 좋아하는 연출 스타일을 잘 알지만, 이 작품은 그렇게 찍고 싶지 않았습니다. 숭고하고 품격있게 안중근과 독립군의 정신을 담고 싶었어요.”
전형적인 상업영화의 공식을 따르지 않은 선택으로 오히려 엄중한 시국에 어울리는 작품이 됐다. “우리 앞에 어떠한 역경이 닥치더라도 절대 멈춰서는 아니 된다”는 안중근의 담담한 내레이션은 관객에 따라 큰 울림을 줄 것이다. 영화 관계자는 “계엄 선포 전에 봤을 때와 후에 봤을 때 느낌이 다르다. 관객 역시 비슷한 감정을 느낄 것”이라고 기대했다. 우 감독은 “관객들 역시 안중근의 말이 이 시국에 위로와 격려가 됐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다만 영화를 다 보고 나서도 안중근이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 점은 아쉽다. 인간 안중근을 조명하고자 했던 영화임에도 정작 주인공 안중근의 내면을 피상적으로 탐구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우덕순 등 다른 캐릭터들도 기능적으로 쓰였다. 공들인 비주얼, 비장한 분위기에 비해 이야기는 비어있다는 인상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