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그란의 마음극장 영화 ‘도그맨(Dogman)’영화 ‘도그맨’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제공일주일에 한 번 친구들과 영화를 보고, 한 달에 두세 번은 개봉을 앞둔 시사회에 가고, 연말 약속도 주로 좋아하는 극장에서 잡을 만큼 나에겐 영화가 늘 생활 속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엔드 크레딧이 다 지나가도록 여운에 잠기게 만드는 만족스러운 작품을 만나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에요. 별로 까다로운 성격이 아닌데도 말이지요. 뭐가 성에 안 차고, 무엇이 좋았는지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게 답답해서 그걸 알아내려고 글을 쓰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깨달았어요. 어쩌면 마음에 쏙 드는 영화 열두 편과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마음에 잔잔한 파동을 일으키는 책 한 권. 머릿속에서 저절로 울려 퍼지는 사운드트랙. 어쩌면 내 곁에 그걸 남기기 위한 여정인지도 모르겠다고요. 내 노후에 필요한 것은 그것뿐이란 생각을 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왜 좋아하는지 또렷하게 설명해줄 반려 영화와 책을 남기기 위해 그토록 눈을 혹사시켜온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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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도그맨’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제공극장과 서점이 옛 모습을 잃고, 영화와 책이 올드미디어로 밀려나며 그 영토가 급속도로 메말라가는 걸 느낄 때면 한없이 쓸쓸해지지만 그러다가도 어느 순간, 기적처럼 다시 가슴이 벅차오르는 어떤 순간이 찾아오기도 해요. 우리가 감동이라는 감각의 동료임을 새삼스레 느낄 때, 그 찰나의 순간에 깃드는 알 수 없는 반가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는데, 영화 ‘도그맨’(뤽 베송 감독, 2023년)속의 샐마가 적절한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이렇게 멋진 선물을 얼마 만에 받나 몰라.” 주인공 더글러스가 샐마를 찾아가 꽃다발과 함께 스크랩북을 건넸을 때, 샐마가 한 말이에요.
그녀가 걸어온 시간 속에 아름답게 반짝였던 순간들을 빠짐없이 모은 더글러스의 스크랩북. 샐마 자신도 다 기억하지 못할 크고 작은 족적들이 담긴 기록물들을 소중히 수집하며 꾸밈을 더해온 더글러스의 스크랩북을 끌어안으며 샐마가 “오랜만에 받아보는 멋진 선물”이라고 했을 때 알았어요. 그 대사가 바로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서 뤽 베송 감독이 기대하는 반응이라는 걸요. ‘최고’라는 칭송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까지의 시간을 함께한 친구들에게 ‘오랜만의 즐거움’을 선사하려고 꾸린 선물인 게 느껴졌거든요. 받는 이들의 마음이 주는 이의 마음과는 어긋날 수 있다는 걸 충분히 알고 받아들일 만큼 성숙했지만 실은 여전히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도요.
영화 ‘도그맨’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제공어쨌든 뤽 베송 감독은 오랜 동료(에릭 세라)와 의기투합해서 못다 한 말도 하고 꽤 후련하지 않았을까 싶었어요. 영화 속에 흐르는 음악에서 이제는 같이 늙어가는 두 장인의 오랜 우정을 느껴보는 건 큰 즐거움이었죠. 음악으로 하는 두 사람의 교감을 관객으로서도 느낄 정도로 나 역시 그들과 꽤 오랜 시간을 겹쳐 살아왔구나 싶었어요.
영화 속의 주인공 더글러스에게도 그런 친구 하나가 있었다면 좋았을 것 같죠. 그랬다면 아마, 길잃은 모든 개들의 친구이자 가족이며 구원이 되어주는 도그맨은 못 되었을 테지만. 그가 개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찾아낸 방식 중에 어떤 것은 이 사회와 맞지 않았어요. 그러다 그는 유치장에 갇히게 되고, 경찰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사람을 조사하기 위해 정신과의사 에블린이 호출되죠. 사람들의 세상에서 더글러스와 마음을 나눈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바로 그녀였죠.
영화 ‘도그맨’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제공어린 날, 주방에서 요리하며 유럽의 레코드를 듣던 모습으로 남은 어머니, 그리고 청소년 보호소에서 그에게 셰익스피어의 세계를 가르쳐준 연극 교사 샐마, 그리고 그에게 질문을 하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에블린. 내가 처한 현실과 다른 세계가 있다는 걸 더글러스는 여인들에게서 배웠죠. 더글러스에게 언제나 노래를 들려주던 어머니. 에블린은 어머니가 떠난 것을 원망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이런 대답을 들려줘요. “야생에서 약자는 잡아먹힐 뿐이지만 인간 세상에서는 약한 자들이 늘 살길을 찾아내지요. 잠시동안이나마. 결국에는 신이 보살피니까.”
청소년보호소에 있던 더글러스에게 연극을 가르쳐준 샐마는 그에게 일어서는 힘을 불어넣어 준 사람이죠. 셰익스피어 작품을 연기할 수 있으면 어떤 것이든 연기할 수 있고, 상상의 세계에서는 자기만의 왕국을 세울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했어요. 그리고 에블린. 그녀는 상담을 마치고 유치장을 나서면서 더글러스에게 마지막으로 물어봐요. 왜 자기한테 다 털어놓았느냐고. “우리한테는 공통점이 있으니까요.” “그게 뭐죠?” “고통이요.”
영화 ‘도그맨’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제공더글러스의 삶에 빛을 비춰준 세 여인을 통해 어쩌면 뤽 베송 감독 자신이 하고 싶었던 고백을 한 것 같아요. 못한 부분도 있겠지만요. 더글러스의 책장에 가득 꽂혀 있던 책들이 참 인상적이었어요. 더글러스의 책들은 책등을 보이지 않고 책배를 앞으로 해서 꽂혀 있었죠. 그를 배척하지 않고 두 팔 벌려 환영해준 세계가 그 속에 있었어요. 언제든 펼쳐서 그 안으로 들어가면 된다고 믿는 듯하죠. 그게 책의 마음이겠죠.
어쩌면 영화의 마음도 같지 않을까 싶어요. 제목을 알 수 없게 포스터를 뒤집어 놓고 우연히 들어오는 관객을 기다리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어요. 무엇을 보여줄지 알 수 없는 제목 없는 영화 같고 표지 없는 책과 같았던 더글라스에게 기회를 준 건 밤무대였죠. 그곳에서 그는 자신에게 폭력과 외로움만 주던 세상에게 자신이 가진 최상의 아름다움을 꺼내서 나누어주었어요. 그 장면을 생각하면 언제라도 눈물을 흘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참, 더글러스는 아버지가 우발적으로 쏜 총에 새끼손가락을 잃었어요. 그때 총알이 척수에 박혀서 걸을 수도 없게 되었죠. 그는 평생 휠체어 신세를 졌어요. 그렇지만 아주 걸을 수 없는 건 아니라고 했어요. 걷고 나면 죽게 되기는 하지만요. 그걸 더글러스는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몇 분간”이라고 했어요. 인생이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시간이라는 건 더글러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숙명이겠죠.
그는 보조장구 없이 설 수도 있었어요. 무대에서 한 곡의 노래를 부르는 동안은요. 그가 무대에 서서 노래하던 그 가슴시리게 뜨거웠던 몇 분간, 그리고 죽음을 향해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치열하게 내딛던 그 아침을 이야기하기 좋은 시즌이 돌아왔어요. 한 해의 끝에 설 때마다 느끼는 공허와 이 세상에 쏟아지는 끝없는 환멸을 어떻게 다룰 수 있을지, 영감을 나눌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이 세상에서 내가 받은 고통이 바로 다른 문으로 들어가는 열쇠가 된다는 걸 기억하고, 그것이 열어낼 보물상자가 얼마나 많을지 상상해낼수 있다면 남은 날들이 두렵지 않을 것 같아요.
영화 칼럼니스트 이하영 ha0282@naver.com